콜드 케이스: 서울

2X05


돈의 노예


"세상 천지에 믿을 놈 하나 없어요, 형사님."


1.

복학생 김경수에게 2009년의 여름은 만만치 않은 계절이었습니다. 방학 동안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려 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고, 연애전선도 감감무소식. 마침 군대 선임이 소개해 준 일자리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김경수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처럼 돈이 필요한 대학생들과 함께 합숙을 하며, 강연도 듣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일자리였죠. 목돈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좋은 인연을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찾아간 곳이 송파구 마천동.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김경수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바로 근처인 남한산의 등산로였습니다. 당시 거여동과 마천동 일대에 우글거리며 속칭 '거마 대학생'을 양산하던 다단계 회사들이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이 제기되었지만, 범인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 년이 지나, 당시 다단계 사기에 연루되었던 악명 높은 사기꾼 최필헌이 기나긴 도주 행각 끝에 중국에서 붙잡힙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이 사기꾼이 슬쩍 살인사건에 대한 단서를 흘린 겁니다. 당시 자신과 알고 지내던 업자가 질 나쁜 인간이었는데, 대학생 하나를 죽여야겠다고 전화로 논의하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형사들을 혼란시키려는 수작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수사팀 내의 의견도 갈립니다. 노승훈 형사는 최필헌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박태형 형사는 사기꾼의 말솜씨에 쉽게 휘둘려버리고, 2009년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진상은 점점 더 흐릿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한편 최필헌이 슬쩍 던진 말은 백나희 형사를 깊은 고민에 빠뜨립니다. 사기꾼으로 살다 보니 사람 마음은 훤히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최필헌의 말대로, 정말 백 형사는 일을 통해 현실의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걸까요? 어쩌면 최진호 PD와 여동생 백나윤에 얽힌 갈등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어떤 계기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만 하니까요. 여름방학 끝무렵에 김경수가 내린 결단에 대해 알아가면서, 백 형사는 자신의 결심 또한 행동으로 옮기려 합니다.  


2.

매력적인 단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입니다. 다른 컨셉의 수사물 시리즈였다면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명석한 사기꾼이죠. 상투적이지만 재미난 인물이고, 에피소드 내내 약방의 감초 노릇을 톡톡이 합니다. 용의자를 지목했다가, 용의자로 몰렸다가, 숨겨 뒀던 단서를 꺼냈다가, 틈틈이 형사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게임을 벌이기까지. 거의 극의 주연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사기꾼을 이용해 신경을 안 쓰고 있으면 잊어버리기 쉬운 등장인물들의 개인사(백 형사의 애인과 여동생, 강 형사의 죽은 여자친구, 박 형사의 이혼 등등)를 환기시켜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원작에서 사기를 다룬 에피소드는 1X20 "Greed"나 5X05 "Thick as Thieves" 같은 게 있는데, 이 에피소드들은 피해자 본인이 사기꾼이었으니 이야기 자체는 한국판만의 오리지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튀는 에피소드는 아니에요. 딱 <콜드 케이스> 시리즈다운 이야기죠. (스포일러) 사정을 딱하게 여긴 업체 내부인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있게 되었지만, 합숙하며 친해진 동료가 뒤따라와 살해했다는 진상은 기묘하게 4X16 "The Good-Bye Room"하고 겹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의 관계이고, 동기도 '같이 성공하자고 해 놓고' 말을 바꾼 데 대한 배신감이지만요. 그랬던 범인이 정작 첫 취조 때는 과거를 숨기고서 "다단계는 바보나 걸리는 것"이라고 단언했다는 대비도 재미있었습니다. 


에피소드가 다소 평범했던 반면, 백 형사의 개인사는 보기 괴로울 정도로 드라마틱합니다. 최진호 PD는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고, 백나윤의 행동에서는 악의까지 느껴지고, 백 형사는 삼자대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죠. 대면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난 듯 보이지만, (스포일러) 엔딩 씬 마지막에서 백 형사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고생은 끝난 게 아닙니다. 하기야 주인공은 원래 괴로워야 하는 법이죠. 백 형사의 결단이 가져온 후폭풍은 이후의 두 에피소드에 걸쳐서 다뤄지게 됩니다. 


3.

▶도입부에 쓰인 곡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입니다. 소재 때문에 이 노래가 이렇게 불길하게 들릴 수가 없어요.

▶결말부에 쓰인 곡은 리쌍의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최필헌의 모티브는 대규모 피라미드 사기를 벌이고서 중국으로 도주한 사기꾼 조희팔로 보입니다. 중국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영상이 공개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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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케이스: 서울

2X04


이산가족


"누님, 어디로 가소? 나만 또 이래 버려두고……."


1.

1983년 방영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한국 방송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입니다. 6월 30일 첫 방송 이후 전쟁통에 혈육을 잃은 온 국민이 여의도로 달려왔고, KBS 앞 '만남의 광장'에는 벽보가 빼곡이 나붙었죠. 그 중에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조상문 씨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친척 집에서 자라나는 동안, 피난길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누나와 재회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가 되었거든요. 그런 조상문 씨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소식을 들은 누나 조승미 씨가 만남의 광장으로 찾아와, 감격적인 가족 상봉을 하게 된 것이죠. 이제는 결코 헤어지는 일 없이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조상문 씨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재회로부터 겨우 한 달 뒤, 누나가 집 근처 공터에서 괴한에게 머리를 얻어맞아 불귀의 객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사다난한 인생 때문이었을까요, 이른 나이에 찾아온 알츠하이머가 빨리 진행된 탓에 조상문 씨는 이제 혼자 생활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큰아들의 보살핌 가운데서도 의식은 점점 혼탁해질 뿐이고, 가끔씩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1983년의 일, 다시 떠나가 버린 누나의 기억이 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면 하염없이 흐느끼게 되죠. 그런 아버지를 보다 못한 큰아들이 수사팀을 찾아옵니다. 아버지의 정신이 아직 온전할 때, 당시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선 살아남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헤집어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요 증인인 조상문이 백나희 형사를 누나라고 착각하며 당시 상황을 재현하려 한다면 더더욱이요. 한편 정형철 과장의 주도 아래 다른 팀원들은 피해자 조승미가 동생과 재회하기 전의 삶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엇갈리는 증언과 비밀을 감춘 주변인들로부터 이윽고 꺼림칙한 과거의 조각 하나가 드러납니다. 피난길에 헤어진 뒤 너무나도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 온 누나와 동생, 이 두 사람의 상봉이 마냥 감동적인 일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2.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 과거를 기억해낸다'는 시놉시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원작 <콜드 케이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를 상당 부분 가져온 이야기입니다. 5X07 "World's End" 말이에요. 1X04 "Churchgoing People"에서 써먹은 플롯을 조금 더 가다듬고,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건을 이용해서 재미를 더한 에피소드죠. <콜드 케이스: 서울>에서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방송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주요 소재로 등장합니다. 1938년의 "The War of the Worlds" 라디오 방송 대신 1983년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TV 방영인 셈이죠.


원작에 많이 기대고 있다 보니 범인이 누군지도 명백합니다. 원작을 보지 않은 시청자라면 조금 더 놀랐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를 놀라게 한 부분은 이 에피소드만의 고유한 요소인 범행 동기입니다. (스포일러) 서남문은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을 다시 모으려고 했지만, 레즈비언 정체성을 자각하고서 자신의 삶을 살아 온 누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자신을 떠나려 한다 생각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전개. 이 에피소드에서 성 소수자 이슈를 다룰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가족 이데올로기에 얽힌 갈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원작의 테마를 따라가면서도, 흥미로운 변주를 곁들였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원작과 비교하게 되는데, 연출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등장인물이 살짝 가려졌다가 과거의 모습으로 바뀌는 연출은 이 시리즈의 상징입니다만, 이 기법을 회상 씬 도중에 사용해서 등장인물의 '과거의 과거'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은 특히 인상깊은 시도였어요. 사건 배경은 1983년일지언정 그 뿌리는 1950년의 한국전쟁에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기도 했고요. 다만 서남문이 백나희 형사를 누나라고 착각한다는 게 중요한 장치이고, 백 형사의 감정을 뒤흔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두 사람 별로 안 닮았죠? 원작의 오드리와 러시 형사에 비해서 말이에요. 이 연출도 조금 오리지널리티를 넣어 바꿀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3.

▶도입부에 쓰인 곡은 패티 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입니다. 원곡은 박순옥이 부른 1962년 라디오 드라마 <남과 북>의 주제가이지만,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영 당시 주제가로 쓰일 때는 패티 김이 불렀죠. 

▶결말부에 쓰인 곡은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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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케이스: 서울

2X03


풍선


"아니, 오빠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할 거야."


1.

1990년대 후반을 풍미한 남성 아이돌 그룹 '스페이스'는 가는 곳마다 수많은 여성 팬을 몰고 다녔습니다. 콘서트장에서는 흰 점이 박힌 검은색 풍선을 흔들고, 학교에서는 라이벌 그룹 팬과 말다툼을 벌이고, 자나깨나 스페이스 생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학생들이었죠. 박민아는 그런 평범하디 평범한 팬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스페이스가 세상 모든 것처럼 느끼며 하루하루를 열광에 차 보냈지만, 아마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평범한 팬들처럼 각자 좋은 추억을 안은 채 미래로 나아갔을 겁니다. 1998년 어느 날, 유난히 뜨거웠던 콘서트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육교 위에서 갑작스레 추락사하지만 않았다면요. 들뜬 마음에 철없이 육교 난간에서 장난을 치다가 떨어졌다는 것이 당시의 결론이었습니다.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스페이스는 해체된 지 오래고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방향을 바꿔 배우로 꽤 성공한 당시의 리더 민현은 그 때의 영광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받은 팬레터를 산더미처럼 모아 두고서 이따금씩 몇 통을 꺼내 읽기도 하죠. 우연히 그 중에서 박민아의 편지를 꺼내 읽은 것이 1998년의 사건을 되살리는 방아쇠가 됩니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결심했어요. 혹시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꼭 기억해주세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에 멈춰버린 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민현은 박민아 사망 사건을 다시 조사해 주길 수사팀에 요청합니다.


그저 아이돌에 푹 빠져 있었을 뿐인 중학생을 죽이려고까지 할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생각보다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내 드러납니다. 아이돌 팬클럽 활동이라는 게 결코 평화로운 일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영원한 라이벌 그룹 'COC'의 팬들은 상대편을 향해 공공연하게 적개심을 드러냈고, '스페이스'의 당시 매니저는 극성 팬에게 도를 넘은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크고작은 사고가 줄을 잇던 그 열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자는 과연 어떤 위험한 일에 말려들었던 걸까요? 팬레터에 적힌 결심의 의미가 밝혀지면서, 결코 '오빠부대'며 '빠순이' 같은 단어로 깔볼 수 없을 한 팬의 용기도 마침내 빛을 보게 됩니다.


2.

대한민국 1세대 아이돌 팬덤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일종의 대하소설처럼 전해 내려오죠. 이번 에피소드는 그 시대 이야기입니다. 열광적인 팬 문화, 팬덤간의 살벌한 분쟁,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까지 전부 들어가 있는 종합선물세트죠. 작중 증인의 입을 빌어 '스페이스의 소속사가 더 힘이 세서 COC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다'는 음모론이 등장했을 땐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어요. 팬덤에 초점을 맞췄기에 연예계 내부 이야기는 '스페이스' 멤버들이 증인으로 등장함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그건 다음 시즌의 에피소드 "슈퍼스타"에서 다뤄집니다.


아이돌 얘기를 빼고 보면 <콜드 케이스>에 종종 있는 전형적인 내부고발자 서사입니다. 바로 전 시즌의 "만화 같은 날" 에피소드와도 비슷해요. 자신이 몸담은 집단 안에서 뭐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단 걸 깨닫고, 용기를 내 막아보려고 하다가 살해당하는 이야기. (스포일러) 이 에피소드에서 피해자가 맞서려 한 것은 '스페이스'의 매니저 강지만이 자기 신분을 이용해서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만화 같은 날"과는 달리 살해범은 성범죄자 본인이 아니라, <스페이스>와 직접 만나게 해 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가 아이들을 강지만에게 소개해 주던 민아의 친구 희주. "그 때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는 범인의 오열이 인상적이에요. 


이 시리즈에서 시대상을 알려주는 디테일을 칭찬하는 건 이제 좀 질리지만, 그래도 언급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목인 "풍선"이 한국 아이돌 팬덤 갈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응원용 풍선을 나타낸다는 건 예고가 떴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건 어떻게 현실의 아이돌 상징색과 겹치지 않는 풍선 색을 골라서 가상 아이돌에게 줄까 하는 것이었죠. 아시다시피 웬만한 색은 다 선점되어 있고, 제작진도 작중 그룹이 특정한 실제 아이돌을 연상시키는 걸 원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과연 작중 '스페이스'의 풍선 색은 '검은 풍선에 하얀 점', 라이벌 그룹 'COC'는 '노란 풍선에 검은 별 무늬'더라고요. 아예 팬들이 콘서트 전 마카로 무늬를 직접 그리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현실과는 좀 다르지만, 재미있는 해결책 아닌가요?


3.

▶도입부에 쓰인 곡은 젝스키스의 <커플>입니다.

▶결말부에 쓰인 곡은 신화의 <천일유혼>입니다. 다른 삽입곡도 전부 당시 아이돌 그룹 노래네요. 당시에 제가 아이돌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졌으면 훨씬 반가웠을 텐데요.

Posted by 코코넛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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